국회 "심재철" 의원 , "서울역 해산이 광주 희생의 원인이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역사 왜곡" 주장

안상일 기자 | 입력 : 2019/06/03 [06:27]

 

 

[ 미디어투데이 = 안상일 기자 ] 국회 심재철 ( 한, 안양동안 을) 의원은 5월31일  '보도자료'를 통해 "서울역 해산이 광주 희생의 원인이라는 문 대통령의 주장은  역사 왜곡" 이라고 주장했다.

 

심재철은 의원은 "민주화 일정 앞당긴다는 신현확 국무총리의 담화와 서울역 '회군'이 아니라 '해산' 이 맞는 표현 "이라고  주장하고있다. 다음은  보도자료 전문이다 ( 편집자 주 )

 

서울역 해산이 광주 희생의 원인이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역사 왜곡

 

문 대통령의 말대로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해산했기 때문에 광주에서 큰 희생이 났던 것인가. 그럼 해산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으면 아무런 희생도 없었을 것인가? 그리고 서울역 시위의 해산이 배신인가? 역사에 가정은 없다.

 

문 대통령은 올해 5.18. 기념사를 준비하면서 내가 광주 518의 발단이 된 서울역 회군 때 그 자리에 있었다.”라고 말했는데 그에 앞서 기고문 평범함의 위대함에서는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은 신군부의 무력진압을 우려해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이때 광주의 민주화 요구는 더 활활 불타올랐습니다.”라고 썼다. 이보다 앞서 문 대통령은 2011년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대학생들의 마지막 순간 배신이 5·18 광주항쟁에서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도록했다고 적었다.

 

이는 분명한 역사 왜곡이다. 1980년대 중후반 극단적인 진보세력의 서울역 회군 때문에 광주 참사가 생겼다는 식의 근거없는 낙인찍기로 시대의 아픔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역사왜곡이 대통령을 통해 반복되는 지금의 현실이 유감이다. 또한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10만 학생들의 열정과 희생을 배신으로 폄훼하는 발언이다.

 

역사적 진실은, 우리 학생대군은 패잔병으로 서울역 광장에서 해산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신현확 국무총리의 TV, 라디오 생중계 기자회견를 얻어냈고 앞으로 이어질 민주화 시위를 위한 전국 5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열린다는 기대감을 갖고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진행되다가 5.17. 저녁 계엄군에 의해 서울의 봄이 중단된 것이었다.

 

서울역 시위의 해산 배경

 

1980.5.15. 오후 서울역 광장에 모인 학생 수는 10만 명이었다고 일컬어진다. 애당초 가두시위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5.10 전국 85개 대학 총학장이 가두시위를 하면 휴교 교치를 할 것을 결의한 다음날 서울대 주최로 서울시내 약 2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에서 신 총리와의 TV 생방송 대담을 제의하고 휴교령이 내리면 싸울 것과 5.16 전국대학대표자회의 소집을 결의했었다. 그런데 5.13. 연세대에서 최초로 교문 밖으로 진출한 후(큰 저항없이 교문돌파 된 것에 신군부의 음모란 시각도 있음.), 5.13. 22:00경부터 서울시내 10여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모여 이제 더 이상 교내시위에만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라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5.13. 고대(7천여명), 건국대(1천여명), 명지대(1천여명) 등 전국 40여개 대학 3만여명이 유신잔당 퇴진’ ‘계엄해제등을 주장하며 성토대회와 농성을 벌렸고 연대 등 6개 대학생 25백여명은 광화문 일대에서 밤 10시까지 야간 시위를 벌였습니다.”(1995.3.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등에 대한 내란, 내란목적 살인 피의자전두환 답변서)

 

마침내 5.15. 오후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들을 비롯해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서울역 광장의 학생들은 광화문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했지만 경찰의 남대문 부근의 1차 저지선에 막혀 있었고 광화문, 종로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전경들과 대치가 계속되는 중에 한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곧 남대문 근처에서 신원불상자가 버스를 탈취해 대치 중인 경찰을 덮쳐 현장에서 전투경찰 1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내막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어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점차 밤시간이 다가오자 큰 충돌이 나서 군 투입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우려가 커졌다.

 

서울역 시위는 각 대학별 역할 분담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어떻게 할 지 등 사전에 구체적으로 계획된 시위가 아니다보니 현장 지휘체계는 아예 없었다. 시민들의 지원은 없었고 더구나 당시는 지금과 달리 핸드폰은 물론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연락이 필요하면 사람이 직접 달려가야 했던 때였다. 어둠은 짙어지고 장비라고는 마이크로버스 위에 달린 마이크 하나뿐인상태에서 사상자 소식은 들려오고 야간의 행동에 대한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 지도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잠실운동장과 용산구 효창운동장에서 군부대가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시민들의 제보가 본 의원한테 전달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역에 모인 학생들의 시위 준비는 매우 허술했다. 시위를 하겠다며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이 확성기라는 기본 장비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로 쪽에 집결한 일부 학교에서는 화염병, 각목 등을 준비해 폭력성을 띄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맨손의 평화적 시위였다.

 

김대중씨는 이 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13일 밤에 시위가 일어나자 시민들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냉정했다. 학생들은 완전히 공중에 붕 뜬 상태였다.”(김대중,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9, 도서출판 인동, p.116) 교내시위에만 머물던 시위방식이 13일 연세대부터 시작하여 가두시위로 바뀌었지만 시민들은 학생들이 왜 시위를 하는지에 대해 아직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또한 이해찬씨의 “14일 가두시위를 평가하는데 공통된 의사는 시민들 반응이 나쁘고 교통장애가 심하여 운전수들 불평이 심하여 우리들이 왜 데모하는지를 잘 모르더라. 따라서 15일까지만 가두시위를 하고 일단 중지하는게 좋다.”(이해찬 합수부 진술서 000429)는 평가는 그 한 예이다.

 

훗날 확인된 것이지만 5.15. 당일 시위대를 향한 군부대의 이동 배치는 사실이었다.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가 발표한 5·18진상 조사결과에도 나타나 있듯이 당시 계엄군은 학생 시위대의 진출에 대비해 이미 무장하고 출동 대기상태에 있었다.

 

, 서울역 시위가 있던 “51518:25서울역 광장 5킬로 주변에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30, 33단 병력 670명과 전차 8, 장갑차 22대가 출동해 대기하고 있었으며, 1, 2, 3군 지역 내에 있는 71개 송전국과 중계소에 계엄군 1,067명을 출동시켜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20사단 3개 연대를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에 출동시켜 대기해 있었다.(육본작명 제16-80, 17-80)

 

육본작명 제12-80, 13-80호에 따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출동이 불가피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5.3.에 특전사 9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켰고, 5.7.에는 특전사 13여단을 서울 거여동에 이동시켰으며, 5.8.에는 특전사 11여단을 김포에 이동시켜 대기상태에 두고 있었습니다.(1995.3.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등에 대한 내란, 내란목적 살인 피의자전두환 답변서)

 

“5.14.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또한 김종환 내무장관으로부터 시위진압을 위한 계엄군의 출동과 주요 국가시설 경호경비 요청을 받은 514일에는 특전사령관에게 특전사 6개 여단을 긴급사태 진압에 투입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를 하였고”(작전상황실작성 제0-203)

 

민주화 일정 앞당긴다는 총리담화 얻어낸 해산

 

각 대학으로 사람이 달려가 연락이 닿는 대로 모인 9개 대학의 학생회장단 회의가 현장에서 급하게 열린 것은 저녁 7시쯤이었다. 회의 장소는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대 속에 끼어 있는 서울대 본부에서 빌려준 마이크로 버스였다. 마이크로 버스 안에서 열린 학생회장단의 회의 주제는 이 자리에서 계속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일단 돌아갈 것인가였다. 논의는 회의 초반 두 갈래로 갈렸으나 난상토론 끝에 결국 야간에 어떤 충돌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고, 야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통제 불가능한 유혈사태가 날 수도 있다는데 모두가 공감했다. 또한 학생들이 시내 진출할 때 시민들이 보여준 반응이 냉랭한 것을 보면 대국민 홍보작업이 좀 더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나는 해산 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박호와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안그리고 서울대 이수성 교수와 함께 남대문경찰서를 찾아 그곳의 전화를 통해서 내무부장관과 통화해 민주화일정을 앞당긴다는 신총리의 약속과 연행 학생들의 석방, 그리고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받았다. 약속대로 7:50분경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신현확 국무총리의 TV, 라디오 생중계 기자회견이 있은 후 8:30분 본 의원은 신총리의 기자회견 사실과 학교로 돌아간 후의 향후 행동 지침은 16일 오후 3시부터 열릴 전국 5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에서 결정할 것이라는 점을 발표했다.

 

해산을 하고 학교로 돌아간다는 본 의원의 발표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함성과 박수로 그러한 결정을 받아드렸었고 곧 이어 마무리 집회를 갖고 그날의 투쟁을 기꺼이 마무리했다. 곧이어 단국대 학생들이 먼저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며 퇴계로를 향하여 광장을 빠져나갔고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등 서대문구에 위치한 대학의 학생들은 염천교를 통하여 광장을 빠져나갔으며 서울대 학생들은 용산쪽을 향하여 시위대열이 움직여 나갔다. 십만대군 학생들이 봄날을 뜨겁게 달군 그 날의 가두시위를 마감하고 광장을 빠져나간 것은 밤 9시를 넘어서였다. 듬직한 어깨들을 맞걸고 학교를 향하여 걸어서 돌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힘찬 발걸음에는 민주화가 앞당겨지리라는 기대가 서려있었다.

 

다음날인 5.16. 서울대의 경우 많은 학생들이 유인물을 들고 대국민 홍보전에 나서는 한편 오후 15:00 부터는 이화여대에서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53명이 모여 다음날까지 28시간 연속 회의를 하던 도중 17일 저녁 무렵 계엄군의 급습으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리고 말았고 이것이 미완의 서울의 봄으로 역사에 남았다.

 

문 대통령이 서울역 해산을 대학생들의 마지막 순간 배신이라고 폄훼한 것은 극히 유감이다. 문대통령은 서울역에서 해산하지 말고 진군했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해산하지 않고 야간에 진군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신군부가 광주에서 학생 시위에 발포하고 비극이 벌어졌던 것을 보면 서울에서는 광주보다 훨씬 더 큰 참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은 자연스럽다. 또한 서울에서 유혈사태가 생겼으면 광주 참극을 막을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10만 학우들의 5.15. 서울역 광장시위를 자기 멋대로 왜곡하는 것은 유시민씨도 마찬가지이다. 유시민이 TV프로그램에서 서울역 시위와 관련해 버스 위에 올라가서 해산하면 안된다고 얘기를 하래요. 그래서 내가 올라가서 그 얘기를 했어요라고 마치 자신은 해산을 반대했던 것인 양 말했는데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유시민씨와 관련된 거짓말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시위 때 유시민 팬클럽 사이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시위를 독려하기 위한 선동 차원에서 좌파들이 군불 때우던 카더라 통신, 곧 유시민은 진군을 주장했고 심재철은 회군을 주장했다는 거짓 선동이 그럴듯하게 각색되어 유포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유시민은 서울역 서울대 시위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거나 결정권을 갖지도 않았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본 의원뿐이었다. 유시민 자신도 합수부 진술서에서 자신은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중립이었다”, “돌아가자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만일 유시민이 그 시점, 현장에서 진군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면 총학생회장이던 본인과 큰 의견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번도 유시민과 충돌은 없었고 학생회 일을 보는 동안에도 유시민은 본인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본 의원의 발표(830) 후 유일한 마이크시설이 있던 마이크로버스가 출발했고 각 대학별 마감정리 후 10만 대군이 9시경 해산되었던 상황을 비춰보면 진군 연설했다는 개연성은 추호도 없다.

 

서울역 해산 때문에 5·18’ 주장은 허구

 

김대중씨는 5.18광주의거가 자신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을 체포했다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것을 듣고 광주 시민들이 다음날인 518일에 대대적인 저항을 한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김대중 즉시 석방’, ‘비상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투쟁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일본NHK취재반 구성, 1999, 도서출판 인동, p.119)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 당사자인 김대중씨조차 광주항쟁이 자신의 체포가 시작이었다는 것이지 서울역 해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정기용 검찰관도 “1980.5.27. 미국에서 귀국 전 뉴욕타임즈를 보았을 때 광주사태가 발발하였는데 김대중씨를 석방하지 않으면 광주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다는 취지의 보도를 보고 귀국했다고 밝히고 있다.(1994.12.10.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죄 등 피의자진술조서 26701)

 

서울지방검찰청의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과 내란목적살인사건 조사에서 권달씨도 광주상황의 발생 원인을 크게 보면 김대중씨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조치에 이은 연행, 구속이 광주시민을 자극하였고, 게다가 게엄군과 시위군중과의 감정적인 충돌 및 유언비어가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진술했다.(1995.3.14. 달 진술조서, 27121, 50)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들의 의견에 따라 1995년에 전두환 고발인 대표진술을 한 이범씨는 고발인 진술조서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광주 5·18진압이 신군부의 정권찬탈 작전의 일환으로 사전 계획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씨도 시종일관 신군부쪽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17. 체포 당시 김대중씨는 4월 말 확보한 군사2급 비밀표시가 되어 있는 위컴 장군의 켄터키 미육군 장교 클럽에서의 연설문을 비롯해 한국 육군 장성 341명에 대한 출신도별 통계표, 육군참모총장 이하 군사법부·군단장·사단장 등 군 주요지휘관 51명에 대한 계급·직책·성명 등을 기록한 자료를 소지하고 있었다.(김대중 합수부 피의자신문조서 00465) 본인의 사상문제가 불투명하다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말이 있어 80. 4. 성균관대 김O명 교수를 통해 박규 의원을 통해 신군부와 의견교환을 모색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합수부 피의자신문조서 000227~228), ‘주한 미8군사령관 특별보좌관이던 한국계 전진을 통해 미군 철수, 북한의 남침가능성을 파악했다고 진술했다.(김대중 합수부 피의자신문조서 000420~421)

 

학생시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의도를 가진 세력은 존재했지만 80년 당시 집단적인 민주화운동을 견인할 세력으로는 학생세력이 유일했다. 876월 항쟁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열렬한 지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함께 힘을 보태줄 시민단체도 장기간 유신체제로 인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노동운동 세력도 극히 미미했다. 계엄이라는 안개정국은 지속되는데도 정치권은 각자 자기중심으로 집권 가능성을 따져보느라 바빴다. 신군부에 맞서 하나가 되지 못한 정치권의 분열상은 국민을 실망시켰다. 타임즈 등 외신은 한국 국민은 김영삼은 무능하고 김종필은 부패하며 김대중은 믿을 수 없다고 본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김대중씨는 4.7. 신민당 입당 취소선언 직후 본격적인 장외 세력화에 뛰어들었다. 3월 한 달에만 복학생 중심의 투쟁경력이 있는 청년조직을 확대해 3개 사조직을 개설하는 등 총 6개 사조직을 통해 지지세를 확장시켰다. 4.16. 한국신학대학, 4.18. 동국대에서 사조직을 통해 청중을 대거 동원해 5만 청중에게 ‘4·19정신을 계승하자고 연설하고, 4.29. 충남 덕산에서 국회의원 10여명을 동행해 윤봉길의사 추모제에 참석하고, 5.8. 경주 춘향제에서 학원의 족벌체제 타파, 어용교수제거, 민주노동운동의 환경조성, 정치범 석방조건 등이 실현되어야 된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5.11. 정읍 동학제 5만 청중 앞에서 대통령 총리 장관들이 몇십억, 몇천억 축재했다.’고 연설했다. 연설문 3만부 이상과 연설테이프를 대학가와 거리에서 배포했고, 5.7. 민주화촉진 선언문을 대학 대자보에 붙이고 통일당 당수대리 김영 의원에게 자금을 지원해 5.14. 학생 시위지지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서울역 '회군'이 아니라 '해산'이다

 

일부에서는 서울역 해산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 하나의 정치적 선동 개념이다. 회군(回軍)이라는 말은 위화도 회군처럼 하나의 세력이 목표 달성을 위해 진군(進軍)하다가 방향을 튼 것을 말한다. 그러나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역 시위 등 학생들의 시위는 계엄해제’, ‘전두환 퇴진이 핵심으로 안개정국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민주화 요구가 시위의 이유였다. 정치권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소수를 제외한 일반 학생들은 시위를 통해 집권하겠다’, ‘누구를 옹립하겠다같은 생각은 해 본 일이 없다. 결국 서울역 회군이 아니라 서울역 해산이 맞는 표현이다. ‘회군이라는 단어는 십만명 학생들이 해산하는 대신 어떤 희생이 생기더라도 청와대로 진군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표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80.5.15. 대학생들의 서울역 시위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식으로 해산하지 않았다면 5·18도 없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가정법으로 낙인찍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아픔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광주 비극이 안타깝다고 해서 서울역 해산이 없었으면 광주참사도 없었을 것이라는 인식은 서울역 시위가 야간에 지속됐더라면 더 큰 서울참사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법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한다. 역사는 가정법이 아니다.

 

첨부자료

1. 5.15.시위와 5·18 연관관계에 대한 증언

2. 5.15. 신군부 동향과 군투입 준비 상황

3. 서울역 시위에 대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당사자들의 평가

 

 

2019. 5. 31.

국회의원 심 재 철

 

 

<첨부자료>

 

1. 5.15.시위 와 5.18. 연관관계에 대한 증언

 

1995.3.14.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내란목적살인사건 권, 수사기록 27121~27122

 

검찰: 진술인은 광주사태의 발생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 크게 보면 김대중씨의 정치활동 금지조치에 이은 연행, 구속이 광주시민들을 자극하였고, 게다가 계엄군과 시위군중과의 감정적인 충돌 및 유언비어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찰: 공수특전부대의 과잉진압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 숫적으로 엄청난 시위군중을 제압하려고 하면 초기에 다소 강경한 조치가 필요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광주에서는 진압방법에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찰: 부마사태 때는(79.10.26. 직전 부산·마산지역에서 발생한 시위) 강경진압이 주효했는데 광주에서는 강경진압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 부산에서는 유언비어가 일체 없었으나 광주에서는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또 지역정서가 부산과는 다르기 때문에 광주에서는 강경진압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 5·18 조사 결과보고서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신현확 총리에게 경찰력만으로 서울시내 일원의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다며 군의 투입을 건의하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도 군이 주요 시설에 대한 경계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5. 15. 14:00 서울역 앞 광장과 도로에는 서울시내 35개 대학 10만 여명이 집결하여 3일째 시위를 벌였고, 각 지방에서도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서울역에서 계엄 해제등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집회가 벌어지고 있던 현장에서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버스 1대가 진압경찰에 돌진하여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19:50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통해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내년 상반기에 양대 선거를 실시하여 정권을 이양하겠으며, 정치 일정을 최대한 단축하고 계엄령도 사회가 안정되면 즉시 해제할 것이므로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과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서울역에 집결해 있던 시위 학생들은 각자 학교로 돌아가는,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하였다. 시위를 마친 서울시내 23개 대학과 24개 지방대학 총학생회장들은 5. 15. 자정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일단 가두시위를 중지하고 정상 수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5. 16.에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정상 수업이 이루어졌으나, 광주시내 대학생 2만여명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야간 횃불 가두 행진을 벌였다.”

 

2. 5.15. 전 신군부 동향과 군투입 준비 상황

 

1995.3.14.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내란 목적 살인사건 권달 진술조서, 27121, 53

 

검찰: 신군부내에서 이른바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비상 권력기구의 설치가 최초로 논의된 때가 언제인가요.

: 80.5. 초순경이었습니다.

검찰: 한 자료에 의하면 803월 말경, 정권장악에 뜻을 두고 집권계획 연구에 착수하여 4월 말경 비상 권력기구인 국보위 설치 방안, 국보위 위원 인선 등의 준비를 완료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 4월 말 경이 아니라 5월 초순 무렵에 비상기구 설치문제를 검토하였습니다.''

 

1995.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 내란 목적 살인 피의자 전두환에게 보낸 질의서

 

“805월의 충정부대 이동상황을 보면, 5.3 육작명 제12-80호에 의거하여 9특전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 지시하고, 5.6. 육본 작전전 제214호를 통해 해병1사단 1개 연대를 소요사태에 투입하도록 지시하고, 동일 육작명 제3-80호에 의거하여 13 특전여단을 5.8. 01:00경 거여동으로, 11여단을 5.10. 01:00 김포로 각 이동시키고, 5.9. 육본 작전전 제214호 수정1호를 통해 해병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토록 지시하고, 5.13. 1군의 경장갑차 26대를 수경사에, 3군의 경장갑차 24대를 수도군단에 각 배속시키고, 5.14. 08:50경 전 소요사태 진압부대에 투입준비를 지시하고, 5.15. 12:00경 육작명 제16-80호에 의거하여 20사단(60연대와 포병단 제외)을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으로 이동시키고, 5.17. 00:01 육작명 제17-80호에 의해 20사단 60연대를 태릉으로 추가 이동시키는 등 비상계엄확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군부대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런 군병력의 이동은 누가, 언제 어떻게 결정하였는지.”

 

1995.7.18.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 5·18 관련 조사결과 27

 

동일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은 5월 중순 북괴가 남칠할 가능성이 짙다는 이른바 북괴남침설을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 부장 서리에게 보고하였고. 5.12. 임시국무회의가 긴급소집되어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참석, 북괴 남침설 분석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군과 경찰에는 비상경계체제 돌입령이 시달되었음.”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5·18사건 조사 결과보고서

 

“5.12. 임시국무회의가 긴급 소집되어 중정 담당부장이 출석하여 보고하였으며, 군과 경찰에는 비상경계체제 돌입령이 시달되었다.”

 

서울지방검찰청, 전두환 내란음모사건피의자 권달 진술조서, 1995.3.14., 27116, 45

 

검사: 김대중씨가 87.12.17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기자회견을 하면서 신군부가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자신의 체포를 결정한 것이 80.5.14 이라고 하는데 어떤가요?

: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그 무렵에 결정된 것이 사실입니다.”

 

, 14차 공판조서 001139~001141

 

회의가 끝날 무렵(1980.5.12. 18:00 이후 북악파크호텔 모임) 전화가 왔는데 한상씨가 모친상을 당하였다는 내용과 군대가 진주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3. 5.15. 서울역 시위에 대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당사자들의 평가

 

김대중, 17차 공판조서 0016456~001647

 

김대중: 4·19는 학생뿐 아니라 국민의 전반적인 지지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4.19때와는 달리 안보문제가 그 당시보다 시급한 것을 알고 학생이 빨리 데모에 나올 것을 국민이 바라고 있지 않았다고 보고, 그래서 이제는 여론에 의해서도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이 4.19때와 다르다고 보았으며 이번의 학생들이 판단이 성급했다고 보며, 5.12.에 데모는 학내에서만 하기로 결정을 했다고 해서 잘했다고 했는데 왜 13일부터 교외시위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일본NHK취재반 구성, 1999, 도서출판 인동, p.115

 

그러나 학생들 가운데에는 자제하지 못하고 문제를 확대시켜 폭력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다. 13일 저녁 늦게, 서울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전국 33개 대학의 대표 35명이 모였다. 13일 밤에 시위가 일어나자 시민들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냉정했다. 학생들은 완전히 공중에 붕 뜬 상태였다. 다음날인 14일 오후 예정대로 학생시위는 서울, 대구, 광주, 청주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대대적인 반정부 가두시위가 확산되었다. 참가한 학생들은 6만여 명에 달했다. 경찰과의 충돌로 약 600여명이 연행되고, 양쪽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법정진술

 

변호사 허경만: 6·3사태 때의 학생 데모와 5.12.을 전후한 이번 학생데모에 대한 차이점과 학생데모로서 정권장악을 할 수 있다고 피고인은 생각하였는가요.

: 6.3사태 때는 공화당 당사를 학생들이 습격하고 시경이 훼손되었고 국회의원이 국회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번 학생들 시위는 국민들이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 데모로는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18차 공판조서 001742~1743)

 

, 17차 공판조서 001707

 

법무사: 국민들이 호응을 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민주 회복이 된다고 낙관론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판단은 학생들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설훈, 19차 공판조서, 001915~001916

 

재판장: 피고인은 폭력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게 하고, 상여를 만들어 메고 시위를 하고 여의도 광장 및 서울역 등지로 뛰쳐나왔는데 6·3 사태 및 부마사태 때도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으나 결과는 치안마비와 유혈사태가 뒤따랐습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시위를 막는 경찰이 나쁘다고 각목을 휘두르고 돌맹이를 던져 다치게 하였습니다. 피고인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평화적인 시위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폭력이냐 하는 것은 피고인들이 편리한대로 정한 것이 아닌가요. 상여를 만들어 메고 다니다가 불태워 국민을 자극시키고 또 현 정부를 부정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설훈: 폭력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도 저항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잘못하니까 시위를 하는 것이고 폭력화 하는 것은 정부가 총과 칼로써 막기 때문입니다.

재판장: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경찰이 저지를 하면 그에 수반하여 학생시위가 극렬해지고 질서가 문란해지면 결국 군이 출동하게 되고 그에 따른 충돌로 인해 희생자가 생기게 되면 4·19와 같은 사태가 벌어져 무정부 상태가 되어 현 정부는 붕괴되는 것으로 체계화되는데 피고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설훈: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면 정부에서는 어쩔 수없이 계엄령을 해제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군이 투입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이해찬, 15차 공판조서 001450

 

검찰: 피고인은 1980.5.14. 12:00경부터 서울대 데모대원 만이천명의 대열에 끼어 대치하고 있는 경찰에게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영등포 로타리까지 폭력가두시위에 가담한 사실이 있지요.

이해찬: 시위대는 먼저가고 약 2킬로미터 후방에서 따라 갔습니다.

검찰: 2킬로 정도 떨어져 따라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해찬: 검거될 우려가 있어서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 합수부 진술서 000892~000895

 

“5.8. 12:00 국민연합 조직국장 장O표로부터 계엄해제, 신현확 전두환 공직사퇴, 정부개헌주도 노력 포기 등의 내용으로 한 국민연합 외 5.7일자 선언문을 받고 동일 18:00경 영동 고속버스 터미널 옆 지하 경양식집 애천에서 이O신범, 이해찬, O, O, O, O, O태 송O덕 등을 만나서 국민연합에서 5.7 성명서 내용을 주지시키고 각 대학은 동 성명서를 유인물로 만들어 각 대학 담당별로 제작 참조토록 하라고 지시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유발도록 하라고 준비지시했습니다.”

 

이해찬, 합수부 진술서 001394~001395

 

“5.8. 본인은 반포 애천에서 이O범 조O우 박O동 이O준 문O주 김O남 이O표 설을 만나 조O우로부터 5.7일에 국민연합에서 성명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내용이 상세히 기억되지는 않으나 요지는 국민연합민주화궐기대회선언으로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그 자리에서 조우와 이범은 이제 국민연합과 대학이 연합하여 반정부투쟁을 실시하여 가두시위를 가열시켜 시민들이 호응하고 군이 출동을 하게 될 것이나 총을 쏘지는 못할 것이며 4.19사태와 같이 정부공공기관이 점거되고 정부기능이 마비되어 정부가 전복된다고 말하였는데 그리되면 그 수습을 위해 국민연합을 모체로 한 과도임시내각이 구성될텐데 그렇게 되면 국민연합 공동의장이며 전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씨가 정권을 잡게 될 것이라고 본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참석자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판단되었으며 국민연합 유인물 2매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설훈 검찰피의자신문조서 002123-2124

 

“5.9. 교내 학생회관 서클실에서 박O동과 만나 그 내용(: 민청협간부회의)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폭력시위에 의하여 정부를 타도하는 방안으로서 그 내용은 가급적 조속한 시일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준비하여, 학교별로 출발하여 광화문네거리에 집결한다. 중앙청을 비롯한 정부주요시설을 점거하되 그 대상은 각 대학 학생회장회의에서 결정 시행한다. 데모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각 대학별로 각목, 돌멩이, 화염병을 미리 준비한다. 경찰은 사기가 저하되어 있으므로 투석만으로도 저지선을 돌파할수 있지만 만일 군이 출동한다면 4.19.떄와 같이 발포는 안하겠지만 그 저지 과정에서 충돌이 예상되므로 다소간의 희생은 각오한다. 만일 부상자가 생기면 일반 시민들도 흥분하여 이에 가담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정부는 타도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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