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재철 " 의원 , " 유시민" 합수부 '진술서 전문' 국민에게 전격 공개하다

안상일 기자 | 입력 : 2019/05/06 [18:24]

 

 국회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합수부에 제출된 "유시민" 진술서를 6일  전격 공개했다. 다음은 언론에 공개한 유시민 진술서 전문이다 (  심재철 의원이 제공한  진술서 원문은 20쪽 이며  그대로  전재한다 = 편집자 주 )

                                     

                                          다                          음

 

                                      국민께 진술서를 공개합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5월 1일 알릴레오 유튜브 방송을 통해 심재철과 유시민의 합수부 진술서 동시공개를 제안했고 나 역시 동의했다.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기록은 지금까지 국민 앞에 공개된 적이 없다. 따라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기록 안에 포함된 합수부 진술서 공개는 국민의 알권리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그 안에 거론된 학생운동가들의 실명은 굳이 익명처리하지 않았다. 1980년 미완으로 끝났지만 서울의 봄 서울역 광장에 섰던 우리는 당당하고 순수했다. 우리 세대 학우들에게 때 늦은 봄소식을 전하며 이 기록에서 실명 언급된 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바란다. 

 

1988년 5.18광주민주화운동청문회를 앞두고 나는 유시민으로부터 8년 전 치안본부 지하실에서 고문으로 점철된 내 진술서를 건네받았다. 국회청문회를 앞두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자료가 청문위원에게 배포되었는데 이해찬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막 취업한 유시민은 전체 2만 쪽 자료 중 나의 합수부 진술서만 건네주었다. 고문으로 점철된 나의 고통스런 기록을 그렇게 8년 만에 마주했다. 이후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내란사건 고발인 자격으로 서류를 작성할 때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 입증증거였던 유시민의 진술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때 비로소 유시민이 검찰측 참고인이었다는 사실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유죄 판결의 핵심 증인으로 판결문에 판시되었음을 처음 알았다.

  

유시민의 진술서는 전지적 관점에서 관찰자적 시각으로 학우들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진술서는 심재철의 공소사실의 핵심 입증 증거로서 활용되었으며 그의 진술서에 내 이름은 모두 78번 언급되었다. 또한 1980년 6월 11일의 유시민 진술로 인해 행적이 소상히 밝혀진 77명 학우 가운데 미체포된 18명은 그의 진술 직후인 6월 17일 지명수배되었다. 그 중 15명은 심재철의 유죄를 입증하는 합수부 진술을 해야만 했다. 유시민의 진술로 故김병곤 선배는 심재철에 관한 합수부 증거이기도 하지만 신군부가 의도한 민청협의 복학생을 통한 재학생 시위 교사의 정황증거가 되어 이해찬 씨에 대한 검찰측 핵심 증거로 판결문에도 인용되었다. 유시민은 당시 운동권 핵심인물이었지만 진술서 제출 이후인 1980.8.20. 아무런 처벌 없이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본 의원의 진술서는 글 중간에 ‘입니다’ 가 ‘다’로 바뀔 정도로 고문으로 흔들렸다. 본인의 진술서는 본인의 행적에 관한 것이 90%였고 다른 사람에 관한 것은 “유시민과 이홍동이 회의에 참석했습니다”와 같이 단순기술 단 1회였다. 본인의 진술서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이미 유시민의 진술서로 말미암아 지명 수배된 서울대 단과대학 학생회장 4명에 관한 한 줄의 단순 기술이었거나 혐의와는 상관없는 일반 선배들로서 내 진술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명수배되거나 혐의가 인정된 사람은 없었다. 나는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피력하고 김대중 씨 등 정치권의 개입이 없었음을 일관되게 주장했고 이 같은 진술은 공판에서도 유지되었다.

  

본 의원이 수배 중일 때 5.22. 합수부는 ‘김대중으로부터 심재권의 안내에 따라 심재철이 선거자금 100만원을 받았다’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중간수사발표를 하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4.11. 수원 농대에서 열린 故김상진 열사 장례식에 김대중 씨가 참석했을 때 준 조의금 20만원 수표는 총학생회 통장을 거쳐 故김상진 열사 모교인 농대학생회를 통해 추모비 건립과 유족에게 전달된 것이 입증되어서 기소되지 않았다. 김대중 씨와 본인 역시 공판 중 일치되는 진술을 했다. 그 외 본 의원을 제외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전부는 김대중 씨나 측근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법정 진술을 했다. 김대중 씨 공소장에 본인의 이름은 없으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증거목록 103쪽에서 타 피고인의 공소사실 입증 증거나 증인으로 본인의 이름이 기재된 것은 없다.

  

“검찰: 학생들에 데모를 못하게 하였다는데 김상진 추도식에는 왜 갔었나요.

 

김대중: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그 정신을 존경합니다. 정치인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대전에 갔다오던 길에 분향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함석헌씨와 갔다가 그 유족이 있어서 제가 20만원 함선생이 2만원 해서 22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비서를 시켜서 주었고분향소에 가보니 학생이 모여있었는데 함석헌 선생을 소개하고 저를 소개하는데 김대중이라고 해서 기분이 나빴는데 조사를 한마디 하고 왔습니다.“(1심 7차 공판조서 001677~1678쪽)

  

그 자리에서 본인은 김대중 씨에게 발언기회를 주면서“지금 김대중 씨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코 우리들이 어느 특정인을 지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여러 가지 의견들 중의 하나로써 우리들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발언했다. 당시 본인은 타임지 기자인 C.J.Chang과의 회견에서도 ‘기성 정치인들이 불신을 받고 있는 지금 학생이 정치인에게 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심재철 합수부 진술서 정수 3128~3129)

  

2016년 4월 총선 투표 하루 전 날 유시민은 본 의원의 지역구인 안양에 왔다. 유시민이 정의당 후보 선거지원을 와서 나에 대한 악담을 하며 낙선운동을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나는 유시민에게 개인적으로는 원한을 살 일이 없었다. 그런데 유시민은 나와의 사적인 일화까지 공개해가며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고 그것은 노유정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현재까지도 재생되고 있다.

 

4월 20일과 공영방송을 통해, 그리고 5월 1일에는 유튜브방송 알릴레오를 통해 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유시민의 왜곡된 허위사실이 전달되었다. 그는 학생회 간부로 공개된 사람들에 관해서만 진술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복학생 등의 가두시위 독려 등 학생운동권 내부 움직임 등을 진술해 다른 학우들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의 칼날이 되었다. 그는 ‘진술서 쓰는 동안에는 맞지 않으므로 맞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오랫동안 진술서를 썼다’고 말했다. 이는 고문으로 고초를 당한 민주화운동가들의 희생과 고통에 대한 폄훼이다.

 

그 자신이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들끼리 진술서를 받다가 뭐가 나오면 비교를 해요. 서로 정보 공유를 하고. 그러고 ‘야 이 건은 얘가 이런 진술을 했는데 쟤를 좀 족쳐봐’ 그러면 인제 딴 사람 관련된 딴 사람을 족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이 유리한 진술을 누군가가 하면 그 진술에 맞춘 진술을 하도록 두들겨 패는거죠,“(KBS-1TV 대화의 희열1, 2019.4.27.)

  

상세한 진술이 당사자들에게는 목을 겨눈 칼로 바뀐다는 것을 이렇게 잘 알면서도 자신의 진술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 체 한다는 것인가. 당시 수사관들이 기대하는 이름과 내용이 기술되지 않은 진술의 댓가는 폭력과 고문으로 돌아왔지 않은가. 1980년 5월 17일까지 학내사정을 상세히 서술한 유시민의 진술서로 인해 수사당국은 상세지도를 확보하게 되었다. ‘김대중과 관계있다는 민청협 회장 이해찬’ 진술은 김대중의 사조직 국민연합의 산하단체인 민청협 수사로 방향을 틀게 한 것으로 보이고, 결국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민청협 5명과 관련 복학생 1명은 피고가 되며 민청협이 복학생들을 통해 재학생들의 시위를 사주했다는 밑그림이 완성된다. 유시민의 6.11. 진술서에 발언 등 행적이 상세하게 등장하는 77명 학우 가운데 미체포된 18명이 6.15. 지명수배된 것은 상관없는 일이었는가. 당시 아무리 계엄치하였다 해도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에 대한 혐의가 진술되지 않았는데도 막무가내로 지명수배하고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유시민이 1980년 당시 고문을 견뎌가며 학우들을 지켰는지, 상세한 검찰측 참고인 진술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방송을 통해 문장력을 뽐낼 만큼 진술서가 국민 앞에 당당한 내용인지는 이번에 공개되는 진술서 전문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본인의 저서에서 밝힌 대로 피조사자에게 수사국 사무실 청소를 시키는 호의를 베푼 것은 어지간한 협조관계가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80년 5월에 계엄사 합수부에 잡혀갔을 때도, 나는 그 ‘티케이의 의리’ 라는 것 덕분에 약간의 '혜택'을 받았다. "경상도 놈이 그런다"고 처음에는 덤으로 주먹질을 하기도 했지만, 부산 출신 국장은 내 진술의 허점을 설렁설렁 넘겨주었고 나중에는 사무실 청소를 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호의'(?)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유시민 저「대선 게임의 법칙」 107쪽, 돌베개 출판사, 1997)

  

유시민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는 1985년의 ‘항소이유서’가 국민들 상당수에게는 80년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오인되고 있다. 최근 KBS-1TV 에 출연한 정치평론가 P씨도 “그러니까 저 항소이유서가 나오고 난 다음에 심재철 당시 학생이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거든요. 체포가 됩니다.”(KBS-1TV ‘사사건건’, 2019.5.3.)라고 말할 정도로 국민을 오도한 것은 한 예이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민간인에게 폭력을 가한 19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의 주범으로 유시민이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나서 썼던 글이다. 항소심에서 형이 줄어 그는 징역 1년의 실형을 살았다. 유시민은 항소이유서에서 80년 당시에 영문도 모른 채 공소취하로 석방되어 48시간만에 군대 강제징집 되었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8월 20일 불기소로 석방되어(80.8.20. 경향신문) 2주 후에 군에 입대했다.

  

자신의 행적을 미화하는데 거리낌 없는 유시민은 본 의원의 진술서를 공개하라고 했다. 그는 알릴레오에서 ‘80년 당시 심재철이 자수했고 어떻게 형집행정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본 의원은 당시 6월 30일 자수했고, 2심 재판 후 피고인 24명 중 7번째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이어 군에 강제징집 되었다. 당시 본인에게는 현상금 백만원과 일계급 특진이 걸려있었고 숨겨 주거나 도피를 도와준 사람도 계엄법과 형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계엄공고가 내걸렸다.(80.6.24. 동아일보) 본 의원의 고향인 광주에서의 당시 참상과 사회 저명인사 97명의 자수명단은 도피하던 나에게 전망의 부재로 느껴졌다.

 

역사 앞에 서는 각오로 유시민 이사장과 본 의원의 진술서를 가감 없이 국민 앞에 공개한다. 유시민은 그의 진술서에서 나를 78번 언급하며 내 공소사실의 90%를 입증해 판결문에 증거의 요지로 판시되었지만 유시민은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본 의원은 수사관의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유시민의 이름을 ‘회의에 참석했다’며 단 한번 거명했다. 누구의 진술이 수사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동료들의 목을 조였는지 국민들께서 진술서를 읽어보고 판단하시리라 믿는다.

  

                                                2019. 5. 6.

                                      국회의원   심   재    철

 

  다음은 유시민  진술서  전문 이다

       

진술서(1)

 

본적

주소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3학년

유시민()

 

1. 저는 일전에 미처 진술하지 못한 사항이나 잘못된 사항, 불명확한 사항을 상세히, 잘못을 수정하고 명확하게 진술코저 합니다.

 

1. 저는 310일 경 오후 17102호 강의실에서 개최된 경제학과총회에서 경제학과 과회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총대의원회의 대의원 자격을 취득하였읍니다.

 

1. 1980.3.15.경 오후 2시쯤 사회대학생 회실에서 사회대대의원회의를 열고 있었는데 안건은 아마 신입생환영체육대회 개최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때 현 서울대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이 찾아왔읍니다. 총학생 회칙상 총학생회장은 각과대표 및 계열대표 124으로 구성되는 총대의원회에서 간접선거로 뽑게 되어있었고 입후보 요건으로 최소한 10이상의대의원 추천서를 입후보 마감 시간 전까지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토록 되어있었으므로 심재철이 사회대 대의원들의 추천을 받으러 사회대학생회실로 찾아온 것이었으며 그냥 추천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몇마디 질의응답을 해보았는데 그때 심재철은 써클활동의 자유, 학내언론자유, 집회의 자유 등 잃어버린 권리의 회복을 모토로 삼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것이 저와 심재철의 첫 대면이었읍니다. 그후 328일 이전까지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금전수수, 음식, 술대접 등은 전혀 없었으며 선거유세할때만 청중속에 섞여 심재철이 연설하는 것을 들었읍니다. 심재철은 324일과 27일 양일간 오후 1시 아크로폴리스에서 연설하였는데 그의 모토는 교내의 언론, 출판, 집회 등의 자유회복과 유신잔재청산, 대학문화혁신3가지 였다고 알고 있읍니다.

 

1. 318일경사회대 대의원회의를 하는 도중 사회학과 대의원인 유현오, 정치학과 대의원 김종명, 외교학과 대의원 전상훈 등이 사회대는 대의원 수도 11명으로 많고하니 총대의원회의장을 우리 사회대에서 배출해보자. 사회대에서는 항상 경제학과가 제일 규모도 크고 리이더격이니 유시민을 후보로 내어보자고 주장하였고 총학생회칙상으로 볼 때 총대의원회의는 그리 자주 열리는 것도 아니고 학기초와 학기말 그리고 선거할 때 열리므로 그리 시간을 많이 뺏길 것 같지도 않고 대학생활의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저도 승낙하였읍니다.

 

1. 32813:00부터 학생회관 2라운지에서 열린 제1회 총대의원회의에서 총학생회장 선거가 있기 직전에 총대의원회의장 선거가 있었읍니다. 총대의원회의장은 총학생회장과는 달리 실무나 집행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총학생회장이 너무 독단적이거나 부정이 있을 때 총대의원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견제하고 비판하며 학기초와 말에 예산 및 결산 심의·승인을 위하여총대의원회의를 주재하는 것이 그 주임무이므로 일반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선거유세나 합동연설 없이 그 자리에서 출마하여 약 20분만에 선출되었읍니다. 저는 그때 공대 조선공학과 대의원인 이원태군과 경합한끝에 80:31로 당선이 확정되었고 약 5분간의 소견발표에서 저는 학생회는 순수한 학생자치기구이며 우리는 단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모든 외부 세력으로부터 학원의 순수성과 독자성을 수호하여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 바 있읍니다.

같은 날 동의장선출이 끝나고 나서 총학생회장선거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공대의 양 지청후보가사퇴하였으므로 총인원 124명 중 114이 투표한 이 선거에서 심재철(사대 영어과4)김기달(치대본과4) 후보를 92:22로 누르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읍니다.

이 날 선거가 끝난 후 인문대 대의원 회의에서 채택된 병역집체훈련 거부결의문이 총대의원회에 정식 안건으로 제출되었으나 저는 그것을 다음번 총대의원회의의 안건으로 처리하겠다고 하여 그날 토론에 붙이지는 않았읍니다.

인문대결의문의 내용은 병영집체훈련제도는 구체제의 산물이며 군사훈련은 교련교육만으로 충분하므로 학원병영화의 철폐를 위하여 이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라는 요지의 것이었다고 저는 알고 있읍니다.

 

1. 42일경 오후 2시쯤대학본부 학생처장실에서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님을 만났을 때 총학생회칙 중 96학칙개정 발의 및 사전동의권912학교관계당국자의 출석요구129호 중 학교운영의 중요사항3 구절이 명백히 교권과 학사행정권을 침해한다는 이야기를 이수성 교수가 하였읍니다. 그래서 저는 차기 총대의원회의에서 이 대목을 개정할테니 학처장회의에서 총학생회칙을 승인하여 달라고 하자 이수성 교수님은 개정후면은 승인이 가능하다.”고 하셨읍니다.

1. 4919:00~22:00 신촌로타리부근 중국집인 청원에서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이화여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등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이 회의는 서강대 총학생회에서 주최 및 주도하였고 서강대 총학생회장 박성혁이 사회를 보았읍니다. 이 회의에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제가 참석하였읍니다. 회의 내용은 성균관대학교의 병영집체훈련거부 상황보고와 협조책 강구, 경희대, 세종대 등 사립대학의 재단부조리문제로인한 학원사태에 대한 이야기 등 2가지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성균관대학교 총 학생회장이 타학교가 동조해 줄 것을 강력히 총구하는 발언을 하고 이 문제는 성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대학의 공통과제이므로 성대가 십자가를 진 셈이니 도와달라고 하여 성대의 병집거부결의문에 서울대, 연대, 서강대의 총학생회장들이 공동으로 서명하였읍니다.

1. 410일 오후 328103호 대형강의실에서 개최되어 오후 830분 경에 폐회한 2차 임시총대의원회의에서

42일 학생처장 이수성교수가 교권 침해로 규정한 제96회칙개정발의 및 사전동의권학생권익에 관한 학칙개정건의권으로 수정하고 제912학교관계당국자의 출석요구는 삭제하였고 제129호 중 학교운영의 중요사항학생권익에 관한 중요사항으로 수정하였으며 이때 참석대의원은 79명이었읍니다.

동 회의에서 총학생회 각 부장 즉 문예부장 권혁철(공대 전산과4), 사회부장 허남정(인문대 철학과 3), 총무부장 이용화(자연대 계통과3), 체육부장박명기(사대 체육과3),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사회대 정치학과4)인준하였으며 4월혁명기념제 및 4월 가예산을 심의 승인하였읍니다.

3281차 총대의원회의 당시 인문대에서 정식 안건으로 상정한 병영집체훈련거부 결의안을 62명의 대의원이 있는 가운데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총대의원회의장인 제가 결의문 작성 및 인쇄를 위임받았읍니다.

저는 같은날 총대의원 회의가 끝난 후 총대의원회 사무국에서 약 10시까지 결의문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이것을 41110:00경 사범대학 지학과 대의원인 황원기에게 8절지 시험지에 깨끗이 쓰게한 후 4월 혁명 기념제포스타 및 프로그램 인쇄를 위해 마침 학교에 와있던 대한인쇄소 업자에게 부탁하여 2000매를 제작하였으며 대의원들을 통하여 주로 관학캠퍼스에 있는 1학년들에게 배포하였읍니다. 이때 비용은 3만원이었으며 1학기 총대의원회 예산 70만원 중 일부를 총무부장 이용화군으로부터 지출받아 충당하였읍니다. 대한인쇄소의 전화번호나 출입업자 이름은 저로서는 알지 못하며 주로 운영위원회와 집행부에 거래관계를 가지고 있었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가. 김상진 추도식, 장례식)

1. 411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는데 관악캠퍼스에서는 10:00~12:00 사이 총학생회 발족기념식·복교복직 환영식 및 고 김상진 열사추도식을 겸한 행사가 있었는데 저는 그때 사회를맡아 보았읍니다. 그런데 식의 진행이 늦어지자 수원농대캠퍼스에서 12:30경부터 열릴 예정이던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총학생회장 심재철 및 부회장 김학진은 식이 끝나기 15분 전인 11:55수원으로 먼저 출발하였고 저는 끝까지 사회를 보았는데 12:10식이 끝나고 나서 제가 학생들에게 수원으로 갈 사람은 지금 본부앞에 있는 스쿨버스에 탑승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때 웬 복학생 한 명이 와서 모든 학생이 다 수원으로 가기에는 버스 15대로는 부족하니남은 학생들끼리 시국성토대회를 하게 마이크를 넘겨달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총학생회장도 없고 원례 계획에도 없는 순서이니 나로서는 어쩔수 없다라고 대답하면서 마이크·스피커 등을 철거시켰읍니다. 그런데 그 복학생이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를 비난했기 때문에 저도 뭐 잘못한게 있느냐?“면서 약 5분간 다투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복학생이 바로 학기초부터 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사회학과)이었읍니다.

마이크나 스피커 설치는 학생회간부들이 본부 4층 엠프실에 부탁하면 언제든지 설치해줍니다. 그렇게 해주라는 학생처장의 지시가 있은 것으로 저는 알고 있읍니다.

저는 14:00경 스쿨버스로 수원농대로 가서 18:00까지 김상진 열사 장례식과 발인을 보고나서 수원농대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자기는 제주이므로 일찍 나갈 수 없으니 19:00까지 중국집 청원에서 있는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가보라고 하였으므로 18:00경 학교를 나왔읍니다.

19:00~22:00 중국집 청원에서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숭전대 등 학교의 총학생 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열고 성균관대학교의 병영집체훈련 거부 농성 상황을 보고 받은 후 역시 사립대학 족벌재단문제에 대해 경희대를 위한 모금운동 등을 하자는 제의가 나왔으며 이것은 서울대 총학생회 학생활동위원장이 이홍동(정치과4)이 제의한 것입니다. 또한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은 타대학도 같이 교내시위 농성을 시작하여 병집거부 농성을 하고 있는 성대와 보조를 맡추어달라고 촉구하였으나 다른 대학은 아직 날짜가 많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읍니다. 이때 서울대에서는 저와 총학생회장 심재철,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이 참석하였고 심재철은 21:00경에 도착하였으며 사회는 누가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며 모인 것은 49일 폐회시의 약속에 따른 것이었읍니다.

1. 4.12. 19:00~22:00 중국집 청원에서 411일의 회의 끝에 한 약속에 따라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숭전대, 동국대, 이대 숙대 성신여대등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열었으며 숭전대 총학생회장 윤여연이 사회를 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저는 참석치 않고 서울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만 참석하였으므로 저는 회의의 상세한 모르지만 사립대학의 족벌재단의 반성을 촉구하는 9개 대학 공동성명서가 채택되었으며 그 초안은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나. 17. 학생회장단 회의)

1.4.16. 19:00~22:00 중국집 청원에서 서울, 서강대, 연대, 성대, 건대 이대 숙대, 서울여대 등의 총학생회장단이 회의를 개최하고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회의를 주도하면서 4.14 최규하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정부가 학원사태를 계엄연장의 이유로 든데 대해 그리고 신현확 국무총리가 또 유사한 발언을 하고 정부가 개헌주도를 해야한다는 기자회견을 한데대해 시국에 대한 공동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후 설명서 초안 작성을 서울대에서 일임 받은 후 다음날인 17일 오후 3시에 연세대학교에서 모여 초안을 검토한 후 오후 5시에 발표하기로 하였읍니다. 서울대에서는 심재철과 제가 참석했읍니다.

회의가 끝난 후 저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함께 원풍아파트의 그의 누님댁으로 가서 성명서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심재철이 비상계엄 해제” “정부주도 개헌 반대”, “언론자유 보장등의항목을 생각해내어 제 의견을 물었고 제가 거기에 동조하자 그 중 정부개헌 반대문제는 제가 초안하게 하고 비상계엄해제문제는 심재철이 초안하였으며 언론자유보장은 심재철이 쓰다가 저에게 넘긴 것을 제가 마무리 하였읍니다. 다음날 아침 그것을 8절지에 베껴 쓴 저는 연대로 가는길에 14:00시경 교문 앞 복사실에서 20부를 복사하였읍니다.

1. 41715:00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 연대 고대, 성대, 서강대, 건대 숭전대, 동국대, 이대, 숙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등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제가 복사해 온 초안을 검토한 후 자구수정을 하여 다시 연대학생회에서 약 30부를 제록스 인쇄하여 기자들 약 10(동아, 조선, 합동통신, 문화방송 등의 기자)과 학생회장들에게 배포하였고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광호가 성명서를 낭독하였으며 성명서의 제목은 현시국에 대한 공동성명서였고내용은 비상계엄에 대하여 헙법개정에 대하여 언론자유에 대하여 등이었으며 바로 비상계엄해제 정부주도 개헌 반대, 언론자유보장 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읍니다. 이 성명서는 일반학생에게는 배포하지 않았습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나. 기념식 행사 및 시위사실)

1. 419일에는 4·19 20주년 행사가 10:00~11:00 우천관계로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서 열렸으며 약 1000 여명의 학생들과 총장, 부총장, 학처장15분이 참석하셨고 총장 고병익 교수는 기념사에서 이렇듯 떳떳하게 4·19 행사를 학생들과 함께 개최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하였고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는 4·19 당시의 60.4.25 교수단의 시국선언문을 낭독하였읍니다.

이것은 총학생회장 심재철군의 부탁에 따른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또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4.19 20선언이란 유인물을 자신이 작성, 집행부를 시켜 약 300부를 인쇄하여 기념식장의 기자들과 학생들에게 배포한 뒤 자신이 식장에서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은 한국의 현대사는 4.19 정신과 그것을 죽이려는 자 사이의 투쟁의 기록이며 지금도 반민주와 민주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으며 반드시 민주가 승리할 것이다라는 것이었읍니다.

기념식이 끝난 후 약1000여명의 학생들과 10명의 교수들(즉 부총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학장 등)은 스쿨버스와 전세버스 28대를 타고 4.19 묘소를참배하였으며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오후 230분경 4.19 20선언을 묘지의 탑아래에서다시 한번 낭독하였읍니다.

1. 42322:00시경 봉천동 소재 세운여관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

총학생회 부회장 김학진(조선공학3)

사범대 학생회장 진영효(교육학3)

자연대배명규( · 3)

공과대양점식( 3)

약학대김대중(제약 3)

사회대유승호(경제 3)

등과 제가 같이 모여 병영집체 훈련거부 계획을 수립하고 있을 때

저는 운영위원이 아니므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말에 따라 한쪽 구석에서 하늘색 볼펜으로 존경하는 학부모님께라는 제목의 가정통신문을 초안하였읍니다.제가 이 유인물을 초안하는 동안 운영위원들은 병영집체훈련기간인 54에서 513일 사이에 학교에서 정상수업을 해주지 않더라도 학생들끼리 3·4 학년의 1학년 반으로 들어가 교양세미나를 한다거나 학술토론대회를 단과대학별로 계획 준비하기로 합의를 보고 공대 학생회장 양점식군의 제의로 학교에 정상수업을 요구하기로 하고 또 약대 학생회장 김대중군의 제의로 학교에 개별입소통지서를 발송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로 하였읍니다. 한편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성균관대학교의 경우 국민들의 여론이 별로 좋지 못하다. 우리도 괜히 이 문제를 꺼낸 것이 아니냐? 우리가 정부에 말려드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읍니다.

저는 이 유인물 초안을 동월 2409:00시경 총학생회장의 책상위에 놓아두었고 그것을 운영위원들이 2500를 인쇄하여 단과대학별로 나누어서 1학년들의 가정으로 발송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1. 4.25경 학생처장실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만나 문제가 되고 있던 병영집체훈련 거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적이 있는데 이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학교에서 개별 입소통지서를 발송하지 말것과 입소기간인 5.4~5.13 열흘동안 1학년에 대해 정상수업을 실시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중 개별입소통지서를 학교측에서는 발송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내었고정상수업 관계는 확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읍니다.

1. 4.28 15:00~18:300 종로 한일관에서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열렸는데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이 참석하였고 본인은 참석치 않아 참석한 학교나 주도한 사람 등 자세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5월에 들어가면 학원의 이슈를 교내문제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확산시키자는이야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1. 43011:00경 저는 수원 농대에서 어용교수 문제로 교내시위가 428일부터 일어났고 급기야 30일에는 학교를 점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놀라 수원농대로 출발하였읍니다. 1330분경 농대에 도착한 저는 오후에는 원인과 상황 등을 파악해보고나서 19:00~ 5103:00시까지 열린 평교수협의회와 학생회의 회담에 같이참석하여 사태를 파악한 후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려면 어용교수로 지목되고 농교육과 송해균 등 세교수가물러나거나 학생들이 농성을 끝내야 하는데 어느 한 쪽도 양보할 것 같지가 않았읍니다.

저는 농대학생회장 채정석에게농성을 장기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 후 5111:00경 수원농대에서 출발하였습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다. 운영위원회)

1. 51일 약 14:00시 조금 지날 무렵 저는 관악캠퍼스에 다시 도착하였는데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약 2000명이 모여앉아 있었읍니다. 저는 도착즉시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사먹은 후 총학생회장실로 올라가 부회장 김학진군으로부터 병영집체 응소여부를 놓고 18시부터 운영위원회가 있다는 말과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학생들이 복학생 약 300명 외에 대부분이 복학생들의 시국성토대회를 구경하는 일반 재학생들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후 사회를 본 사람이 박우섭(자연대 미생물학과)이며 그가 사회, 구호선창, 데모지휘등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은 14:30시부터 16:00 사이 아크로폴리스와 교문사이의 진입로를 왕복하면서 계엄해제등의 구호와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교내시위를 벌였읍니다.저는 그것을 구경하지 못했으므로 뭐가 뭔지 자세히는 모르나 이날 복학생총회에서의 시국성토와 교내시위가 다음날부터 정치문제를 들고 나올 수 밖에 없는 고조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고그에 따라 학생회는 끌려다닐 수 밖에없었다고 알고 있읍니다.

이날 즉 5118:00부터운영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총학생회장 심재철(사대 영어과4)

부회장김학진(공대 조선공학3)

인문대 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3)

사회대 유승호(경제3)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경영3)

법대 이철우(3)

사범대 진영효(교육3)

공대 양점식(3)

약대 김대중(3)

자연대 배명규(3)

가정대 김경미(의류3)

미대 박종철

총여학생회장 이재인(교육3)

그리고 저 등이 있을 때 18:00시 조금 넘어 연성만(人文大), 심상환(사회학과), 오세중(철학과) 등 복학생 6명 정도가 들어왔고 이때 심재철은 방문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어서 오쇼하고 인사를 한걸로 보아 복학생과 심재철 사이에 미리 양해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명목상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를 보았으나 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 사람은 연성만(인문대)이었으며 심상환등 다른 복학생들은 다들 병영집체훈련을 거부한채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 우리가 민주화투쟁에 대한 여론이나 국민들의 인식이 악화되므로 병영집체훈련거부는 깨끗이 철회하고 52일부터는 교내시위를 벌이면서 비상계엄문제를 이슈화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처음에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 사범대 학생회장 진영효 등이 반대의 뜻을 보였으나 결국 설득당해 복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였읍니다.

이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약 22:00경 이것을 먼저 신문에 발표할 것인가말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다른사람들 즉 운영위원이 아닌 저나 복학생들을 옆방인 집행부실로 퇴장시킨 후 운영위원들끼리 약 23:30까지 의논한 후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5202:00경 한국일보 등 신문기자들에게 발표하였읍니다.총학생회장 심재철은여러개의 구호를 단과대학으로 배당하여 주었는데예를 들어 비상계엄해제하라사범대, 노동삼권보장하라경영대,정부개헌 중지하라는 법대 유신잔당물러가라는 가정대에... 이런식으로 각 단과대학 별로 구호를 하나씩 나누고 각 과별로 글 내용을 자유롭게 피켓 하나씩을 준비하게 하였읍니다. 이 비용은 모두 학생회비 및 과회비로 충당하였다고 알고 있읍니다.

운영위원회의 이 결정은 410총대의원회의에서 가결한 병영집체훈련거부결의안과는 상호 배치되는 것이므로 운영위원회는 의장인 저에게 총대의원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읍니다. 총학생회칙상 운영위원회가 소집을 요구하면 총대의원회 의장은 반드시 총대의원회의를 소집하여서 운영위원회에서 제출한 안건을 토의하여야 합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라. 학생총회 및 시위 사실)

그래서 5212:00시부터는 민주화대총회가, 11:30부터는 총대의원회의가 각각 아크로폴리스 광장 및 학생회관에서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1.5210:00부터는 각과별 반별로 과총회, 반총회를 열어 병영집체훈련응소 설득작업을 대의원학생회간부들이 벌이고 12:00 인문대로부터 입장하기시작하여 하얀 가운을 입은 600여명의 남녀 의대생들이 마지막으로 계엄해제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입장하고 아크로폴리스 약 1300평의 광장은 12,000명의 학생들로 꽉 차버리고 말았읍니다. 이때 같은 시간 저는 총대의원회의를 열고 있었으므로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도 보면서 시국선언문도 낭독하였으며 구호를 선창하고 교내 순환도로를 일주하는 민주화 대행진을 총지휘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때 낭독한 시국선언문은 총학생회장 자신이 작성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56일자 대학신문에 전문이게재되었으며 내용은 역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서는 비상계엄이 해제되어야하며 언론검열제도등의모든 비민주적인 요소를 청산해야 한다는것이었읍니다.

저는 11:30부터 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서 운영위원회의독선적인 응소결정을 지지할 것이냐 아니냐를 의제로 운영위원회 요구로 개최된 임시총대의원회의를 하다가 밖이 시끄러워 26동 대형강의실로 12:30경 옮겨 14:30까지 회의를 한 결과 96명의 참석자중 79명의 찬성으로 총대의원회의가 410일에 결의한 바 있는 병집거부를 철회하고 운영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하였읍니다.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운영위원회의 독선을 비판하면서도 총대의원회가 그 결정사항을 부인하면 학생회가 두 쪽이 난다는 생각 때문에 찬성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날 14:00~17::00시 사이 3시간에 걸쳐 교내 순환도로를 12,000명이 일주한 민주화대행진은 그 코스가 아크로폴리스진입로 교문앞 기숙사앞 교련장 4.19아크로폴리스의 순서였고 연극반의 징과 꽹가리가 힘차게 울리고 각 단대별로 하나씩 15개의 플래카드와 각 과마다 준비한 100여개의 피켓을 앞세우고그 앞 뒤 행렬의 길이는 거의 1.5km 정도에 달하였고 각단과대학 별로 4.19탑에묵념을 드린후 아크로폴리스로 집결하였읍니다.

이때까지 지휘는 모두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맡았으며 대행진이 끝났을 떄 인원은 6000명 정도였는데 19:00시경 이 6000명의 학생이 다시 교문앞으로 집결하였고 이때부터 약 21:00시까지 비상계엄해제」 「신현확 퇴진」 「전두환 되진」 「언론자유보장등을 주제로한 자유성토가 있은 후 약 21:00경 학생활동위원회(위원장 : 이홍동, 정치4)에서 준비해온 2개의 꼭두각시에 신현확, 전두환의 이름을 써서 교문에 매단 후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화형식을 가졌읍니다.이 화형식 준비는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군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저는 이 때 사회를 보았읍니다.

철야농성을 하기 위하여 다시 21:00경 아크로폴리스광장에 모였을 때 인원은 약 3000명 정도 되었으며 식당에서 단대별로 차례차례 저녁식사를 한 후 역시 단과대학별로 도서관 6개방과 학생회관을 이용하여 철야농성을 시작하였고 농성시 토론의 주제나 구호의 내용은 낮시위때와 동일한 것이었읍니다.

이날 17:00경 학생 6000여명이 다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하고 있을 때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 그리고 저와 그 외 2명 정도의 학생회간부들이 앞에 모여있는데이해찬 심상환 등 3~4명의 복학생들이 콜라 5~6잔을 사왔고 그중 이해찬이 저에게 콜라를 주었으므로 제가 411일 일도 있고 해서 화해하느라 먼저 인사를 청하고 악수를 했는데 그때서야 저는 바로 그가 이해찬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제가 일전에 다툰 일은 미안합니다고 사과하자 이해찬은 일을 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면서 수고가 많다고 격려해주었읍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마. 서울대 시위사실)

53오전에는 역시 전날과 동일한 구호를 외치며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 및 교문앞에서 시위, 연좌하였으며 다음날 문무대에 입소할 1학년생들을 입소준비할 시간을 주기위해 약 15:00경에 박수를 치면서 교문밖으로 내보내 1학년 약 1천여명은 그 때 귀가하였읍니다.

이날 13:00경 아크로폴리스에 약 4000여명의 학생이 운집해 있을 때부터 52일 오후2시경 4동 대형강의실에서 총회를 열고 학부 학생들의 교내 시위 및 철야토론 대회에 같은 과의 학부학생들에 섞여 약 500명의 대학원생이 참가하여 쭉 같이 행동하였읍니다.

15:00시경 1학년을 내보낸후 약 3000여명이 교문앞에 연좌하면서 비상계엄해제.과도일정단축. 언론자유보장등을 요구하는 시국성토대회를벌였으며 이 때 사범대학 학생회장이 사회를 보면서비상계엄 해제하라” ‘정부개헌 중지하라등의 구호를 선창하였으며 18:30경 교문앞 성토대회를 마치고 다시 도서관과 학생회관에서 동일한 주제로 철야농성을 벌였는데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각 단대별 농성장에서 자기 단과대학소속 학생들을 지휘하였고 이때 농성인원은 약 2000여명 되었으며 21:30분경고병익 총장님이 농성장을 둘러보겠다는 전화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로부터 총학생회장실로 걸려왔으므로 제가 안내하고 총장 고병익교수, 부총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각단과대학 학장 등 약 십여명이 농성장인 도서관과 학생회관을 둘러보았으며 이 때 총장님은 그냥 농성장에 들어가셨고 그러면 학생들은 박수를 쳤으며 총장님은 답례로 손을 잠깐 들어보이는 정도였으므로 약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읍니다.

이날 밤 총 연극회 학생 약 10여명은 23:00시경도서관과 학생회관에서 농성학생들이 보는 앞에 궁정동사건을 풍자한 연극을 하였읍니다만저는 그 학생들의 이름은 알 수 없고 각 써클은 문예부 소관이므로 문예부장 권혁철(공대 전산3)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모 두 문무대 입소 환송식)

1. 54일 오전10:00부터 교문앞에서는 일학년 병영집체훈련 환송식이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1학년생 약 2500명과 일반학생 약 3000며명등 5000~6000여명이 운집하였읍니다. 이때 사회를 본 것은 인문대 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 3)이었고 그는 환송식이 시작되기 직전 정의가등의 노래를 선창하였고 비상계엄 해제하라등의 구호를 선창하기도 하였읍니다. 여기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환송사에서 보다 큰 민주화투쟁을 위하여입소하는 일학년에게 감사한다고 했으며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는 이 때 일학년들에게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은 학생, 교수 모두가 꼭 같은 것이다. 대학의 파국을 막아준 여러분께 감사한다고 말하였읍니다.

13:00경 환송식이 끝나고 1학년들이 탑승한 버스가 교문을 나설 때 양쪽에 늘어선 300여명의 학생들은 애국가를 불러주었으며 버스에 탄 1학년생들은 정의가등의 노래와 비상계엄해제등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떠났읍니다.

1학년들을 보내고 약 3000명의 학생들은 다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하여 농성해제식을 가진 후 15:00경 농성을 해제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이 농성해제식에서도 저는 목이 쉬어서 못하고 인문대학생회장 노창준이 사회를 보았으며애국가를 부른 후 해산했는데 같은 시간에 교문앞에 있던 200여명의 전투경찰도 철수하였읍니다.

같은 날 18:30경 총학생회장 심재철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부회장 김학진 문예부장 권혁철과제가 같이 봉천동의 한식집(한식집이름 미상)에서 생선찌개와 곱창을 시켜 저녁식사를 하고 소주 2정도를 마셨는데 저는 이때 워낙 피곤하였으므로 술은 한 잔 밖에 마시지 않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그동안 모두들 수고했면서 격려해주고 식사대 약 10,000원도 자기가 지불하였는데 그 돈의 출처는 알지 못합니다.

 

52~4일간의 농성기간중 특히 중요한 것은 51일밤 갑자기 병영집체훈련 응소결정을 내린 학생회가 학생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고 궁지에 몰려있던 5212:)0시부터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일만이천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민주화대총회중 김부겸(복학생, 정치학과4)이 아주 탁월한 웅변력으로 민주화투쟁을 위해 응소키로 한 총학생회의 결정은 아주 훌륭한것이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함으로써 일만이천 학생을 멋지게 설득하고 위기에 처한 총학생회를 구출해 주었기 때문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많은 복학생중에서도 김부겸에 대해서 가장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총회가 끝난 후 김부겸형이 학생회를 살려줬다라고 심재철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읍니다.

 

위 기간 중 농성비용으로 사용된 자금은 모두 총학생회 예산에서 지출된 것이며 특히 식사비는 제가 알기로 250만원 정도나 지출되었다는 이야기를 54일 농성이 끝난 후인 16:00경 총무부장이용화군으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읍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2. 모두 학생총회)

56일 오후24동대형강의실에서 저는 임시총대의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총원 132명중 약 100명이 참석하였고 여기에서는 우선 농성비용등으로 학생회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었으므로 1000원씩의 추가회비를 1인당 징수하여 민주화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이 가결되었고 운영위원회의 독선을 막기위하여 운영위원 18, 의장단(총대의원회의장과 단대의장) 16, 복학생7이내로 구성되는 민주화투쟁위원회(가칭)를 결성하고 복학생은 표결권이 없이 고문으로 참석케할 것을 의결하였읍니다. 1인당 1,000원씩의 회비는 각과별로 걷는 중이었고 민주화투쟁위원회(가칭)는 복학생들의 불참통고와 의장들의 저조한 참석률로 인하여 결성조차 되지 못하였읍니다. 복학생들은 불참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고 단지 그런 식의 기구에 참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더란 이야기를 57일경 총학생회장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읍니다.

 

5715:00 ~ 5.8 10:00사이에는 사범대 인문대 약대의 공동시국성토 및 교내시위 철야토론대회가 있었으며 참가인원은 약 1500명 주제는 비상계엄은 왜 해제되어야 하는가였다고 알고 있으며 저는 참석치않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5815:00 ~ 5910:00사이에는 법대 경영대 미대의 공동 시국성토대회 및 자유언론 쟁취대회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개최되었고이때 송건호씨와 해직기자들이 참가하였다고 알고 있으며 학생회관에서는 철야토론회가 약 1000명정도가 참가한 가운데 열린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세한 것은 제가 참석치 않아 알수 없읍니다.

 

1 5915:00~ 51010:00 사이에 공대 음대의 시국성토 및 교내시위 철야토론회가 있었고 참가인원은 약 1500명 주제는 비상계엄해제정부개헌 반대등이었다고 알고 있으며 농성장은 학생회관이었읍니다.

같은날 17:00부터 문무대에 입소한 1학년생 위문이 있었으므로 총학생회장은 같은 날 17:00부터 고대 학생회관에서 있을 예정이던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단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과 제가 회의에 참석하였읍니다. 이 회의는 5.9 17:00~ 5.10 05:00 시 사이에 고대 학생회관 3층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는데 서울대 고대 연대 이대 성대 서강대 건대 숙대 동국대 숭전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외국어대 전북대등 주로 서울시내 약 20개 대학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였는데 사회는 고려대 학생회장 신계륜이 맡았으며 이 회의에서 채택된 현시국에 관한 제2공동성명서의 초안도 고려대학교에서작성하였고 그 내용은 역시 비상계엄 해제” “정부개헌 중지” “언론자유보장등이었읍니다. 이때 건국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총학생회장들이 서울대에서 괜히 무책임하게 “14일 휴교령이 내리면 15일 오후3영등포로터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겠다52일 심재철이 발표하여 이 말이 휴교령에 관계없이 무조건 15일 가두시위를 벌이겠다는 것으로 와전되어 터무니없는 “15봉기설이 나돌게 되었다고 공격했읍니다. 그러나 휴교령이 내릴 경우 그 다음날 가두시위를 벌인다는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52일 발표에는 별 이의가 없었고 강남 강북 강동지역의 학교들끼리 모여 의논한 끝에 만일 휴교령이 내리면 강남의 대학은 영등포로터리에, 강북은 공덕동로터리, 강동은 청량리와 서울운동장의 2곳에 오후3시 집결키로 결의되었읍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2.가 학생회장단 회의)

51115:00~51205:00에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소회의실에서 서울대 주최로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서강대 건대 중앙대 외대 숭전대 명지대 국민대 이대 숙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대유공전 등 주로 서울시내 2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열었으며 주최학교인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인 심재철59일 고대회의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고대 총학생회장신계륜이 사회를 보았고 2명 이상 참석한 학교에도 발언권은 한사람에게만 허용되었읍니다. 처음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 총대의원회의장 류시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등 4명이 참석하였으나 발언권이 심재철에게만있었으므로 저는 계속해서 회의에 참석치는 않고 들락날락하여서 자세한 회의의 전개는 알 수 없으나 이날 회의는 내용상 심재철 신계륜 등의 주도하여 4개항의 결의사항이 채택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결의문은 51209:00시 서울대총학생회장실에서 기자들에게 배포되었읍니다.결의문의 내용은 15일 가두시위설을 공식부인하고 교외시위는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 총리와의 TV 생방송대담을 제의 휴교령을 반대하며 휴교령이 내릴 시과감히 싸울것이라는 것 5.16 15:00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전국대학대표자회의 소집을 결의한다는 것이었읍니다.

 

51209:00시경본부 학생처장실에서 제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를 만나 51115:00~ 51205:00에 있었던 서울시내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를 이야기하고 15일 가두시위설을 부인하는 총학생회장단회의 결의문을 전달하자 이수성교수는 문교부차관실로 전화를 건후 문교부에서는 벌써 이 결과를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이제 휴교령 걱정은 없어진 셈이라고 말한 적이 있읍니다.

51215:00~ 21:30 사이에는 사회대 자연대 가정대의 연합 시국성토대회와 교내시위가 아크로폴리스광장 및 교문에서 있었고 진행은 사회대 학생회장 유승호, 자연대 학생회장 배명규. 가정대 학생회장 김경미가 공동으로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저는 11밤 철야회의로 피곤해서 오후에는 학생회관 라운지 소파에서 낮잠을 잤으므로 자세한 진행상황은 모르나 주제는 노동3권보장」 「농민권익보장」 「물가고의 원인등이었던 것으로알고 있읍니다. 낮잠을 잔 후 17:00부터 총대의원회 사무실에서

사회대대의원회의장 유현오(사회3)

인문대 조병식( 3)

경영대 송덕호(경영3)

법 대 이승관(3)

사범대 황원기(지학3)

공 대 윤치은(화학공학3)

자연대 신영길( 3)

약 대 류재하(제약3)

가정대 황선유( 3)

의 대 최병순(본과3)

등과 함께 총무부장 이용화군으로부터 1학기(예산 총 11천만원규모) 예산편성표 설명을 듣고 예산심의절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데 약 21시경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저를찾는다 하여 나가보니 총학생회장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운영위원들이 허겁지겁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고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복학생 김병곤(경제4)은 저에게 계엄군이 1300:00~ 03:00시에 수도권을 접수한다. 그리고 휴전선부근에 긴장이 있다. 이사실은 방송국에서 확인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학생회관 2층 라운지의 농성학생 뒤처리를 저에게 맡긴 후 총총히 복도를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총대의원회 사무국실의 단과대학의장들에게 전하고 의장단회의를 해산시킨후 21:10경 학생회관 2층 라운지로 건너가 농성중이던 약 1000여명의 학생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각 과별로 모아 21:30경에는 거의 해산시켰읍니다. 그때 저와 함께 학생들을 해산시킨 운영위원은 자연대 학생회장 배명규가 있었습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가. 문부대 퇴소환영식)

51311:00 ~ 13:30 사이 교문앞에서는 문무대를 퇴소하는 1학년 퇴소환영식이 개최되었는데 약 4000여명의 학생이 집결하였는데 연사들은 하나같이 12일 밤 계엄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도제대로 않은채 도망친 학생회간부의 비겁함을 비난했으며 다시한번 총학생회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읍니다.

이 때 연설을 잘하는 김부겸이 다시 등장하여 학생회가 잘못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총학생회의 잘못이 아니라 복학생들이 소위 통박을 잘못 굴려서 그랬다고 말하여 총학생회를 다시한번 구제해 주었으며 그의 말로 미루어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김부겸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지 않나 추측됩니다. 그러나 폭락한 총학생회의 인기와 권위는 다시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15일 학생총회에서 가두 진출 여부를 결정짓겠다고 발표하였읍니다.

이 날 22:00부터고대 학생회관에서 고대가 주최가 되고 역시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서강대 건대 중앙대 외대 숭전대 명지대 국민대 한양대 이대 숙대 덕성여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총신대 서울신대 등 7개 신학대학을 합쳐 약 25개 대학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읍니다. 이날 서울대 총학생회장실에서는 18:00부터 가두시위 실행여부를 놓고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제가 고대에 가기위해 21:30경 학교를 나설 때 분위기는 가두시위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총 학생회장 심재철은 최고책임자가 남아서 우리학교 거취를 오늘밤에 결정하겠다면서 저 혼자 고대로 가라고 부탁하였읍니다. 그래서 저 혼자 22:30경 고대에 도착해보니 이미 회의가 시작되어 있었고 제일 먼저 연대 대(총학생회장 박광호가 아니었읍니다)13일 연대의 신촌 및 광화문 가두시위 상황보고는 하면서연대가 제일먼저 십자가를 진셈이고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싸울테니 타대학도 이때 같이 가두시위를 벌여야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은 이미 내일(14) 11:00시 고대로 가두시위를 결정해 놓았다고 이야기 했으며 외대 중앙대 명지대 등 다수의 학교들이 언제든지 가두로 나올 수 있다고 하였읍니다. 대세가 그쪽으로 기울자 저는 학교를 떠날 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아무래도 가두로 나가야 할 것 같으니 가 보고 대세가 기우는대로 결정하고 오너라.”고 귀띔한대로 타대학이 모두 나간다면 우리는 15일날에 가두로 나가겠다. 왜냐하면 14일은 일학년생들이 문무대훈련의 피로를 씼느라 학교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서울15일에는 가두시위를 하겠다고 말하였읍니다. 뒤늦게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형난옥이 너무 성급한 짓이라고 이견을 내놓았으나 연대쪽의 강한 반발과 이미 기울어진 대세 때문에 역시 가두시위를 하기로 하였읍니다. 이 회의는 1405:00시에 끝났습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가. 15.의 가두 시위사실)

1. 51407:00경 학교로 돌아와보니 운영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저는

총학생회장 심재철(사대 영어과4)

부회장 김학진(공대 조선공학3)

인문대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3)

사회대 유승호(경제3)

경영대 정철상(경영3)

공대 양점식( 3)

자연대 배명규( 3)

등이 있는데서 회의 결과를 보고하자 운영위원들은 하나같이 오늘(14) 나가면 휴교령이 내릴텐데 내일(15)까지 미룰 수 없다며 총학생회장 심재철을 중심으로 교문돌파계획을 짰고저는 약 10:30까지 눈을 붙였읍니다. (총여학생회장실 소파에서)

11:00시 경부터 단과대학 학생회장의 지휘아래 단대별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한 인원은 7000명 정도였으며 그중 음대 미대는 낙성대쪽 후문, 공대 법대는 귀가하는 듯이 학교를 나가 봉천동4거리, 신림동4거리에서 12:00경부터 집결시위하도록 되어 있었고 가정대 여학생들은 공대 공사장쪽에서 돌을 주어 날랐읍니다.저는 이 학생총회에서 사회를 보면서 13일 밤 고대회의 결과를 보고하였고대다수 학생들이 박수를 쳤고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은 간단한 가두시위 선언을 하였읍니다. 심재철의 가두시위선언이 끝난 11:30경 저는 마이크를 들고 모든 학생들이 교문으로 힘차게 뛰어갈 것을 지시하였읍니다. 이때 학생들이 막 아크로폴리스를 빠져나갈 즈음 학생처장 이수성교수가 총학생회장 심재철에게학생들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평소의 주장대로 교수들이 중재를 해서 학생과 경찰의 피흘림이 없는 평화적 가두시위를 할 수 있도록 교섭할테니 30분간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으나 학생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하며 무시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교문앞의 약 200여명의 전투경찰 지휘자에게길을 비켜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150분경부터 두 대의 페퍼포그차가 맹렬히 뿜어대는 페퍼포그와 최루탄터지는 소리, 최루탄 연기 자욱한 가운데 돌이 나르기 시작하였고 약 40분간의 투석전 동안무수한 돌멩이와 페퍼포그가 오간후 약 1230분경 경찰이 저지선을 풀어주었읍니다. 부상자가 속출하자 (나중에 듣기로 약 30명의 경찰이 부상당하였다함) 교문에서의 저지선을 하는 수 없이 뚫어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후 신림4거리에서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나 별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독산동을 거치거나 대방역을 거쳐 14:30경에는 영등포시장 앞에 서울대생만 5000여명 영등포역앞에 중앙대 숭전대등과 섞여 서울대생 약 3000여명이 집결하여 있었읍니다. 교문을 출발한 후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해제” “신현확, 전두환 퇴진” “정부개헌 반대” “언론자유보장”, “농민권익보호” “서민생활보호” “노동3권보장52일 총학생회운영위원회에서 각 단대별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하나씩 나누어 준 구호였으며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횟불등의 노래를 불렀읍니다.

14:40경 학생 약 500여명이 영등포시장 앞 도로에서 위와 동일한 구호 노래를 외치며 연좌하고 있을 때 학교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부총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사회대학장인 이현재교수, 인문대학장 민석홍 교수등 약 10명의 학처장들이 나타났고 약 40분간 연좌하는 동안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는 교수들이 앞장설테이까 더 이상 나가지 말고 평화적으로 귀교하자고 총학생회장 심재철군에게 말씀하셨으나 학생들사이에 광화문으로라는 말이 퍼져있어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학교로 돌아간다고 메가폰으로 이야기하자 야유가 쏟아져 나오고 학생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심재철 학생회장은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광화문으로 가두시위할 것을 결정 발표하였읍니다. 저는 성대가 약해 영등포까지 오는동안 목이 다 쉬어버렸으므로 학생들을 지휘할 생각을 포기하고 학생들 틈에 섞여있었고 영등포를 떠난후 그날은 교수님들은 다시 뵌 적이 없읍니다.

15:30경 영등포를 출발한 서울대생은 반씩 나누어 한 패는 여의도 통과 마포를 지나 서울역으로 가두행진했고 나머지 반은 제2한강교 신촌로타리를 거쳐 광화문으로 가려다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 막혀 일단 굴레방에서 흩어졌다가 약2500여명이 마포를 돌아 서울역으로 행진하였읍니다. 이때부터는 학생회간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19:00~22:00시 사이 학생들은 서울. 건대 중앙대. 이대. 성대 동국대 등이 마구섞여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경찰 저지선은 시청-광화문 사이만을 차단하고 있었으므로 시청앞 광장~서울역광장, 을지로 등을 온통 비를 맞으며 비상계엄해제” “전두환 신현확 퇴진등을 외치며 가두시위 하였읍니다. 이 때 저는 학생들틈에 섞여 있었는데 21:30이 가까와오자 초조해졌고 학생들을 해산시킬일이 걱정되었읍니다.

또 경찰은 마치 공격할 태세를 취하며 페퍼포그를 뿜기 시작했읍니다. 제가 얼핏보니 경찰저지선에 서서 지휘하시는 분이 평소 서울대 정문에 오시던 분(계급은 총경) 이어서 제가 손을 흔들며 달려가서 인사를 드리고 22:00까지 해산시킬테니까 그동안은 페퍼포그를 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자 응낙해 주셨읍니다. 그래서 22:00경 학생들을 (숫자는 알수 없었음) 시청앞 광장 프라자 호텔쪽에 집결시킨뒤 애국가와 만세삼창을 하고 정확히 22:05에 완전히 해산시킨 일이 있었읍니다.

1. 5.15 12:00 아크로 폴리스에서는 약 5000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학생총회가 열렸읍니다. 이 총회는 심재철이 141130분경 휴교령이 내리지 않으면 1512:00에 학생총회를 아크로폴리스에서 다시 열겠다고 말한데 따라 개최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사회를 보았는데 강경론과 온건론이 대립하여 서로 양보할 기미가 없었으므로 저는 중립을 지켰읍니다. 양쪽이 팽팽히 맞선 상태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이 상의하여 16:00 서울역광장에 집결하는게 어떠냐고 제 의견을 물어보았고 저는 좋다고 대답했으며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약 14:20오후4시 서울역 집결을 발표하고 학생총회를 마쳤읍니다.

이때 체육부 부장 박명기(체육 3), 문예부장 권혁철(공대 전산 3)등은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의 허락을 얻어 방송차를 마련하고그것을 확인하러 학생처장실에 올라가서 이수성교수를 만났는데 그것이 약 15:40정도 되었을때 였고 이수성교수가 늦었으니 내차를같이 타고 가자고 해서 운전기사, 처장, 심재철 그리고 제가 같이 학생처 승용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는데 서울대들이 어디있는지 알수가 없어 제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에게 높은데 올라가서 찾아봅시다.”라고 말씀드리니까 이수성교수가 심재철과 저를 데리고 대우빌딩 21층의 어떤 사무실로들어갔고 그곳에서 저희학교 학생들이 역광장에 있음을 발견한 심재철과 저는 학생처장님과 헤어져 역광장으로 내려왔읍니다.

서울역광장에 집결한 약 4000여명의 서울대은 이때부터 21:00시 해산 때까지 계속 역광장에서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고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등의 노래를 부르며 연좌만 하다가 20:30경 서울총학생회장 심 재철이 서울역에 집결한 각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결정한 사항을 발표한다면서이의가 있드라도 따라 줄 것을 당부한 후 각 학교별로 귀교하거나 해산한다고 발표하였읍니다.총학생회장들이 어디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지 잘 모르겠으며 이어 심재철은 다음단계의 행동은 오늘 저녁(15) 22:00시 고대에서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열어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읍니다.학생들에게 발표할때 발판으로 이용된 것은 서울대학교의 마이크로버스였으며 이 마이크로버스에 방송기재를 싣고 갔었읍니다.

이 발표에 따라 서울大生중 약 2000여명은 21:00경 서울역을 출발하여 동일한 구호를 외치면서 용산, 노량진, 장승백을 경유 야간 가두시위를 벌였고 24:00시가 다 돼어서야 봉천동 고개를 넘어 학교에 도착했읍니다. 총장님의 지시인지 학생처장님의 지시인지는 알수 없으나 노량진역 못미쳐 5대의 스쿨버스가대기하고 있어 여학생일부와 낙오자들은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고준비돼어 있던 라면과 우유를 먹고 각과 사무실 혹은 도서관에서 취침한 후 다음날 아침 모두 귀가 하였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서울역 광장에는 낮에는 약 5만의 학생 5만의 시민이 모여있어 농성하기에 괜찮지만 밤이 되어 춥고 배고프고 시민들마저 다 귀가해버리면 무슨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일단 해산시킨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날 밤에(22:00) 고대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는 심재철 혼자 참석하였으므로 상세한 결과는 알지 못하며 별로 중요한 결정사항없이 1615:00부터의 梨大에서 열릴 전국대학대표자회의로 미룬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나. 학생총회 사실)

1. 516

12:00경 총학생회장 심 재철과 학생활동위원장 이 홍동이 저에게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사표를 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번 가보라고 하였읍니다. 이야기 인즉 15일 밤 서울역에서 학생들이 해산할 때 이수성 교수가 내무부장관님과 협의해서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는데 15일 밤 이 수성교수가 학생들에게 평화적으로 해산하라고 했을 때 학생처장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불신감을 드러내는 학생들이 많았고 또 실제로 高大 학생들이 귀교도중 경찰과 충돌했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것이 사표의 이유였읍니다. 제가 처장실에 올라갔을 때 처장님은 총장실에 계셨으므로 저는 총장 비서실에서 약 5분간 기다리다 처장님과 함께 학생처장실로 돌아왔읍니다. 그리고는 정작 사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16은 가두시위를 안해도 될 것 같다는 말씀만 드리고 같이 교직원식당에서 점심으로 육개장을 먹은후 본부 앞에서 헤어졌고 이때 학생처장 이 수성교수는 자꾸 강경파에게 밀리지 말고 소신껏 학생들의 피를 흘리지 말고 활동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후 저는 이수성교수를 만난적이 없읍니다.

13:00~ 15:00시 교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는 가두진출문제를 놓고 다시 학생총회가 열렸으나 이틀간의 피로가 겹쳐 가두진출 하고자 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으므로 사회 및 진행을 맡아본 총학생회장 심재철 및 운영위원들의 주장대로 당분간 가두시위 없이 유인물을 통해 시민들에게 우리의 주장을 알리는 홍보활동을 할 것이 결의되었읍니다. 저는 이 회의에 참석지 않고 학생식당에서 쉬고 있다가 16:00시경 일찍 집으로 돌아갔읍니다.

5.16. 15:00 ~ 5. 17. 사이에 이화여대에서 열린 전국대학 대표자 회의에는 심재철과 이홍동이 참가하였고 저는 그 후 위 두 사람을 만나거나 대화한적이 없으므로 회의의 경과나 흐름 내용, 결정사항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읍니다. 단지 뉴스에 59개 대학 90여명 참석이라는 사실이 방송되었기에 알고 있을 뿐입니다.

 

1. 517

10:00경 김 병곤(복학, 경제과4)이 저를 찾아와 총대의원회사무국실에서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지금 대세가 우리한테 유리하다, 이대에서 열리는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런지 모르지만 이 대세를 몰아 19일과 20일에도 가두로 진출해야 한다.”말해 저는 , 알았읍니다.하지만 제가 결정할 일도 아니고 총학생회장이 돌아오면 이야기 해 보겠읍니다.”라고만 대답하였읍니다.

11:00~ 12:00, 사이에

16일 학생총회에서 유인물로 홍보활동을 하려했으므로 도서관과 IMC(교육매체제작소)의 인쇄기 사용을 허락받으러 교무처장님과 학생처장님을 각각 교무처장실 학생처장실에서 만나 부탁드렸는데 교무처장님은 IMC관이 교무처소관이고 원칙적으로 교육매체를 제작하는 데만 사용되게 되어있으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하셨고 이 수성 학생처장님은 학생처 소관인 도서관 인쇄기에 대해서만 도서관장앞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협조토록하겠다고 약속하셨읍니다. 그러나 실제로 12:50경 도서관에는 직원들이 (토요일이라) 다 퇴근한 뒤여서 사용하지도 못하고 총학생회부회장인 김학진이 16:00경 총장님을 공관에서 찾아뵙고 허락을 맡아 IMC관의 마스터 인쇄기는 약 2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었읍니다. 여기서 어떤 유인물을 인쇄하였는지는 저로서는 잘 모르며 복학생 이흥국 황광우 등이 거기에 관여하였다는 것 밖에 모릅니다.

원래 5.16.15:00부터 梨大에서 열린 전국대학대표자 회의에 참석하러 간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활동위원장 이 홍동이 돌아오면 51716:00부터 총학생회장실에서 앞으로의 방향수립을 위하여 운영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위 두사람이 돌아오지 않아서 회의는 하지 못하고

총학생회 부회장 김 학진 (조선공학3)

인문대 학생회장 노 창준 (동양사3)

경영대 정 철상 (경영3)

법대 이 철수 (3)

사범대 진 영효 (교육3)

공대학생회장 양 점식

총여학생회장 이 재인 (교육3)

가정대 학생회장 김 경미 (의류3)

문예부장 권 혁철 (공대 전산3)

등과 같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이대에서는 무슨회의를 24시간 넘게 하느냐면서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1825분경 이대쪽에서 익명의 학생(서울大生)으로부터 총학생회장단 검거소식이 들어왔으나 믿을수가 없어서 조선일보 한국일보등에 집행부실에서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별따른 소식을 얻지 못하였고 고 병익 총장님도 모르고 계셨고 이 수성 학생처장님은 출타중이어서 혹시 연락오면 학교로 전화주시라고 전해달라고 댁에 부탁드린 후에 19:10 정도에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군으로부터 전화가왔는데 본인이 받지는 않았으며 누가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으나 내용은 이대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심 재철의 검거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고 19:30경 이화여대의 평학생 두 명이 도서관에서 목격했다면서 학생회장실에 찾아와서 검거소식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비슷한 시간에 총학생회장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와 노량진에 있다는 전화가 왔읍니다.저는 19:10경 이 홍동의 전화를 받고나서 사실임을 확신하고 학생회관 각 방을 다니면서 전달해서 집행부실에 있던 학생들을 귀가토록했고 학생활동위원회실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복학생 이해찬, 이범영, 김병곤, 연성만, 심상완3명정도 도합 8~9명이있었는데 저는 소식을 전해주고 다시 총학생회장실로 돌아왔읍니다. 20:30 ~ 21:00시 경 학생활동위원회실에서 있던 복학생들이 총학생회장실에 들어와서 사태가 매우 급박한 것 같으니 태연한 척 말고 빨리 피하자.“고 말하고는 자기들먼저 학생회관에서 빠져나갔읍니다.

그리고 나서 21:00~22:00사이 대부분의 운영위원 들이 빠져나갔고 20:10경 제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의 전화를 받았을때 운영위원중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군과 공대부회장 안봉수가 남아있었는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의 법적의미를 학생들은 잘 모를테지만 어쨌든 빨리 피해서 나가라” “전화거는 곳은 문교부 차관실이다는 내용의 전화를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후 이 두사람마저 빠져나가고 저와 체육부 차장 문호준(체육2), 복학생 이흥국, 이흥국의 여동생등 4명이 총학생회장실에 남아있다가 23:40경 경찰에 연행되었읍니다.

 

1. 유인물은 날짜별로 배열할 수 있을만큼 제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므로 따로 진술하겠읍니다.

저희 학교내의 등사시설은 총학생회에 수동식 윤전기 1, 등사기 2, 각 단과대학 학생회 및 편집실에 최소한 1개의 등사기가 있고 각 과마다 과에서 나오는 유인물이나 학생들의 주소록을 만들기 위한 타자기 및 등사기 수동식 윤전기 혹은 복사기가 있읍니다. 그리고 도서관이나 IMC의 인쇄기는 여태껏 학생활동에 쓴 적은 이번의 IMC 인쇄기 이용이 처음입니다.

이번 1415가두시위를 전후하여 배포된 유인물은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시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사실을 고발한다” “물가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계엄하의 언론통제6~7종이 되나 그 중 제가 알고있는 것은 이흥국(복학생, 4) 황광우(복학생, 경제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정치4) 사회부장 허남정(철학3)등이 유인물을 주로 담당하였으며 이번에 나온 유인물중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이 박문식(경제4)군에 의해 초안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유인물 인쇄 및 배포는 총대의원회 결의문 외에는 저와 무관한 일이기 때문에 제가 유인물에 대해서 더 상세히 아는 바는 없읍니다.

 

1. 위 진술이 사실과 틀림 없음을 확인합니다.

 

1980. 6. 12

자술인 柳 時 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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